유다의
영혼가롯유다라는
이름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것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배반자, 사기꾼, 반항자 등등. 그의 오명은 모든 종파를 초월합니다. 그러나, 내가 믿기에는 예수님의 선교초기에는 이 사람도 말씀을 전하는 임무를 맡은 12명의 선택된 사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많은 사람들은 가롯유다를 구원받지 못한 교인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 비록 그가 모든 율법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랐다 할 지라도, 그는 진정으로 거듭난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생각을 요한복음 17장 12절의 해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그러나, 우리가 4대 복음서를 연구해보면 가롯유다도 다른 11명과 꼭 같은 임무와 지침, 그리고 기름부음을 받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는 기록하기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마가복음 3:14,15) 가롯유다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했던 것처럼, 같은 힘의 근원으로부터 똑같은 기적을 증거하였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가롯유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충만을 전하는 도구로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구원 받지 못한 교인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또한 이사실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사도행전 1: 17)
가롯유다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성령충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크게 쓰임 받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가롯유다가 어떠한 이유로 예수를 배신하기 위해서 첫번째 기회로서 일부러 그 12명의 대열에 끼었을 거라고 믿고있습니다. 그렇지만, 방금 마가의 설명에서 처럼, 예수님은 다른 이유에서 가롯유다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다른 사람들은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도록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선택되어졌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그렇게 운명 지어져 있었으며 하나님을 배신할 수 밖에 없었다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가롯유다는 스스로 그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을 수 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지도 모릅니다. 좋던 나쁘던 간에, 그의 미래, 그의 활동들은 자신이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없는 상황이고 외부의 세력에 의해 결정되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 자신의 마음을 정하는 특권이 있습니다.
사실, 가롯유다가 사네드리사람들과 예수를 배반하기로 협정을 하고 유월절 만찬을 위해 다락방으로 갔을 때, 나는 그가 아직 마음을 바꿀 수 도 있었다고 믿습니다.
예수가 그 운명적인 날에 제자들 중 하나가 자신을 배반할 것 이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이 빵을 나누는 동안 그가 가롯유다의 눈을 바라보았을 때, 이 반역자는 예수의 얼굴에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바로 그 한 사람이고 고백했었을 수 도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과의 우정을 30냥의 은화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원하는 것과 바꾸었던 것입니다. 가롯유다는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용서를 받고 다른 형식으로 배반이 일어나도록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고, 그의 영생으로의 그의 운명을 가로 막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육체로서 존재하셨던 하나님과 걷고, 예기하고, 음식을 함께 먹고, 같이 잠자리를 했던 이 사람이 그를 배반하고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팔게 되었을까요?
가롯유다는 예수님과 한번 이라도 함께 한 적이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과 많이 다를까요? 대중에게 설교를 하고 그들의 선교활동에서 기적과 엄청난 성령의 출현을 증거하는 사람들, 우리도 유다와 같이 영적인 오명으로 떨어질 수 있을까요?
배반으로의
길Apostasy배신)이라는 단어는 "종교적인 믿음으로부터의 떠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그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가롯유다도 예수님의 위대한 기적들을 목격하고 함께 한 밤을 거닌 후 그 다음날 일어나서는 그를 배반하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부추김을 당해서 마침내는 하나님에게 온전히 다 바치는 것을 거부했던 마음속의 하나, 아니면 그 이상의 부분들에 의해 방아쇠가 당겨져 버린 느린 진행이었습니다.
성령의 탐색의 불빛이 우리 안에 있는 어두운 부분을 나타내게 될 때, 그것은 우리가 그 부분들을 그의 은혜와 그의 피의 속죄의 능력을 통해 다룰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회개를 하고 우리가 청결해지고 청결을 유지하도록 그에게 계속 기도하게 하는 그의 뜻입니다.
이런 부분들이 무시될 때, 그것들은 사탄에게 문을 열게 되고 , 사탄은 들어와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우리의 즐거움과, 식별력, 그리고 결국에는 우리의 영원을 훔쳐가 버립니다. 가롯유다는 주저함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챤의 생활에있어서 성장과정은 우리가 알고, 인정하고 그리고 나서 회계해야 하는 더러운 점, 구겨짐, 그리고 결점들이 계속해서 보여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신령님의 교정을 부인할 때, 우리의 마음은 더욱더 굳어지고 우리의 양심은 시들어져서 우리가 가장 은혜가 넘치는 설교와 가르침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에 의해 감동 받지 못하는 정도까지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정을 무시할 때 배신은 퍼지기 시작하여, 우리는 세상의 함정에 빠지거나, 상처를 입게 됩니다.
또한 그 배신의 전염은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의 궁극적인 계획과 목적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성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시기를 멈추었고, 이제는 우리의 생각 데로 하나님이 아니기에, 아니 그가 하리라고 들어온 것을 하나님이 하지않으셨기에 우리는 화가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를 하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히브리서 3:12)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 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베드로 후서 3:17)
우리모두는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우리의 죄와 불복종을 문제 삼지 않음으로 인해 믿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는 위험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공격이 어떤 방향으로부터 오건 간에, 우리는 구주 안에서, 그의 능력 안에서 강해지도록 권고를 받고 있습니다. 악마는 집어삼킬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다니는 으르렁거리는 사자와 같이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의 방법은 여러 가지 이지만, 그 결과는 항상 같아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지 하지 않을 때 나타나서 우리를 꽤 뚫어 보고 있습니다.
가롯유다가 예수를 배신하도록 확신 시킨 것과 같은 방법을 사탄은 아직도 오늘날의 크리스챤을 옭아매는 것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1. 가롯유다는 도둑이었습니다. 도둑의 뒤에서 그를 조정하는 힘은 탐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것들을 위해 하나님의 주의를 끌려고 기도와 찬양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진짜 동기는 온전히 탐욕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원하고, 그리고 그것은 보통 세속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이지 하나님의 신령함이 우리의 삶에 더해지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이사야 29:13)
이것은 그 시대의 바리세인에게 예수님이 부과한 죄목과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자주 얘기했습니다. 그들의 삶 전체는 모든 율법을 지키는 데 바쳐졌습니다. 겉으로 그들은 믿음의 거인이었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은 차갑고 죽은 것과 마찬가지 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우리는 돈으로 살 수 있는 멋진 찬송과 찬양팀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교회 바닥은 박수의 진동과, 발구름과 할렐루야를 외치는 즐거운 함성과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흔들리고 있지만,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인간의 가르침과 훈계를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바쳐진 마음이야말로 하나님만을 갈구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신령함을 원합니다. 그 마음은 죄 때문에 부서지고 울고 있습니다..
그 마음은 구세주를 기쁘게 하는 방법을 찾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찬양은 우리를 신령한 하나님이 계신 존재 안으로 데려갑니다.
오늘날, 우리의 기독교 스타일과 찬양은 하나님이 세속적인 것을 만족시키게 하기 위해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주시도록 그려지고 있습니다.
나는 요 전날 한 몇 분 동안 전국적으로 알려진 한 목사를 텔레비전을 통해 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의 프로그램을 틀었을 때, 그는 회중을 이끌고 있는 한 목회자의 뒤에 서 있었습니다. 그 목회자는 요즘세상의 다른 영적 지도자들이 하는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물질을 내려 주십시오" 라고 외치고 있었고, 몇 천명의 성도들이 서서, 외치고, 그들의 주먹을 흔들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을 향해서) "물질을 내려 주십시오", "물질을 내려 주십시오" 라고….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소서. 주여 우리를 용서하옵소서.
어느 지역 목사가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앉아서 기금마련을 위한 텔레비전 쇼를 주최하고 있었다. 경건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그는 관중을 가만히 응시하면서 말하였습니다. 그날 그가 기도실에서 그날 있을 텔레비전전 순서를 위해 기도를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얘기하기를 오늘의 시청자들 중 20명에게 하나님이 얘기를 하셔서 각각1000달러를 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언하기를 어떤 금액만큼 내놓는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기적적으로 그들의 빚이 없어질 거라고 합니다.
나는 선교자들이 교회들에게 여기 오늘밤 10사람이 있는데 100불씩을 낼 것이라고 말하고 "여기로 나오셔서 내가 당신에게 100불어치의 축복기도를 하게하시오." 라고 하면서 헌금을 모으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50불로 그리고 25불로 계속되었습니다. 나는 그 예배에서 축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내 주머니에 달랑 30센트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사랑과 순종에 의해서가 아닌, 그것은 탐욕적이고, 명백하고 간단한 일입니다.
문자 그대로 몇 천명의 교인들이" 번영 부흥희"의 첫번째 줄 좌석을 얻기 위해 대극장과 시민회관입구에 한 줄로 늘어설 수 있다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과의 친밀함이 없이, 하나님의 영보다는 인간에게 더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석률과 헌금을 늘릴 수 있다면, 사람들은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것만을 얘기할 것입니다.
나는 목사입니다. 내가 목사로서 깨달은 것은 돈은 선교활동을 계속해서 진행시키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와 금식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그가 설립하시고, 임무를 내리시고 사명을 지어주신 선교활동을 지원하시는 하나님께 의지하니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우리는 주도록 꼬시기 위해 사람들에게 약속한 것들에 대해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아주 큰 교회는 아닙니다. 다른 교회에 비교한다면 작습니다. 그리고 예산을 세심히 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내려주십니다. 꼭 알맞은 때에, 그는 항상 오셔서 회중들에게 간구하지 않아도 되게, 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도 되게 하여 주십니다.
오늘의 메시지는 더 이상 어떻게 예수님께 다가가는 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순종과 신령함 안에서 동행하는 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사람들을 주도하는
설교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를 얻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에브라인과 같이, 취해왔습니다. 포도주나 강한 술 때문이 아니라, 물질에 취해왔던 것입니다! 이사야 28절에 의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상에 토한 것이라고 나와있습니다.
2. 종교적인 바리세인들과 어떤 제자들처럼 가롯유다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
는 찬양을 식별할 수 없었다.
물질적인 욕망만이 교회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게 되는 유일한 길은 아닙니다.
사대성경을 쓴 4명 모두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님이 초대받은 저녁식사를 방문하는 것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급히 매우 값비싼 향유의 옥합을 깨트렸습니다.
그녀는 그 향유를 그의 머리에 붇고 머리속에서부터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흐느끼면서 , 마음에 상처가 있는 그녀는 무릎을 꿇고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그녀의 눈물로 발을 닦고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닦았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속에는 그에게 감사를 드릴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를 영예롭게 하고, 그의 용서와 구원에 감사의 표시를 할 다른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죄 때문에 마음과 영혼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야말로 영으로 진실로 찬양을 드리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그들을 멀어지게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구원 받고 영예롭게 된 자들입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진실로 상처를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시는 방식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알지 못합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마리아의 상처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녀의 찬양의
방식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에게 보인 전부는 이 여인이 죄인이었다는 것이어서, 예수님이 그녀에게 얘기를 건네고, 그녀가 예수님을 만지도록 하락하는 것을 믿을 수 가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 사람들과 많이 다를 바 가 없습니다. "우리는 담배를 피지도, 술을 마시지도, 담배를 씹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습니다." 죄인들이 우리의 문 앞을 어둡게 하지않는 것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그렇다면, 그들은 돌아오지 않을 것 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누가복음 7:47) 그들의 죄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용서와, 자비와 은혜로 그들에게 달려갈 것이다.
은혜의 샘을 경험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찬양과, 기쁨과, 감사의 눈물이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응답할 수 없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그 여자의 과거가 아니라 돈에대한 사람들의 욕심이 어떻게 반응하는 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마리아가 향유의 병을 깨었을 때, 마태는 말하기를 제자들은 그 기름을 써 버리는 것에 분개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팔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교에 쓸 수 도 있었기 때문이다.
마가는 이야기 하기를 몇몇이 분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가롯유다가 일어서서 말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거기 있던 사람들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 바로 가롯유다였을 수 도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느니" 라는 말씀에서 보이신 예수님의 반응은 가난한 사람들의 수를 줄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육체의 예수와 더 오래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극대화 했습니다.
마리아는 그 순간을 포착했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찬양을 했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구세주를 영예롭게 하였기에 예수님이 약속하시기를 복음이 전파되는 한 그녀의 행동은 높게 받들어져서 기억되게 될 것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가롯유다와 나머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대신에, 기분이 상하여 중얼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마음은 축복이 없이 얘기를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이는, 영원한 열매는 없습니다. 신령함을 갈구함도 없습니다. 일요일 아침에 바깥에서 아주 잠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찬양하지만, 기도하지 않고, 우리는 손을 들지만, 그 일주일동안 우리의 축복의 뚜껑을 을 열어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말이 우리를 바뀌도록 부탁할 필요성 조차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며칠 전 어느 여인과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 여자는 7번이나 성경을 통독했다고 기뻐하면서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한 직 후에 그녀는 직장동료와 그녀의 목사에 대해 안좋게 말을 하였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요! 우리는 귀가 있지만, 듣지 않고, 눈이 있지만 보지 않고, 마음이 있지만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어떤 사람이 길을 묻기 위해 교회에 전화를 걸어 올 때, 그들은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나 아니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음악선교의 방향을 물어 볼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보통 대화 초기에 그 질문들을 하는 진짜 이유가 우리교회의 근원지가 어디인지를 판단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철학이나 영감이 툴사나, 브로큰 애로우, 캔사스 시티 나 포트월스 같은 곳으로부터 오는 것 일까요? 나는 그 도시들로부터 발생하는 어떤 선교활동의 수준을 낮추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성령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의 메아리가 되는 것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 (이사야 29:13 NIV)
우리가 기독교방송 프로그램들을 볼 때, 너무나 많은 설교자들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만 설교하고,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어떤 신선한 말씀을 얻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한 남자가 요벨의 해 (고대 히브리 사람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의 땅으로 들어간 해부터 50년마다 행산 성년)에대해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목회자들도 그것에대해 설교를 하였습니다만, 요벨의 해와같은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느누군가 성령님에게 귀기울고 있었나요? Y2K- 그 것 때문에 책들과 테이프들이 팔려나갔지만, 우리가 들었던 그 길들은 전혀 우리를 스쳐지나가지도 않았습니다.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말씀을 들었었나요? 오늘날의 베로니아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3. 가롯유다는 예수의 적이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요한복음 6:70) 베드로전서 5장 8절에서, 사탄은 우리의 적이라고 간주되어집니다. 적이라는 것은 반대자입니다. 가롯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선교를 반대했습니다. 가롯유다가 하나님이 육체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알게 된 이유가 무엇이던 간에, 그가 상상해 왔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때문이 아니고, 그는 그 진실한 선교를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똑같은 덫에 빠질 뻔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