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이 없는 십자가와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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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고린도후서 3:2,3) 이 구절은 꽤 명료합니다. 교회를 접하러 오는 사람들은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신령과 예수님의 존재를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의 자아가 죽고, 우리의 육신이 죽어서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하나님의 영을 위해 막히지 않고 흐르는 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온 세계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복음이신 예수님의 열정을, 사도행전의 기적을, 성령님이 주시는 선물을, 요한의 글에서 표현되어지는 사랑을 그리고 또한 바울이 권고한 바로 잡아져야 될 점을 경험하여야만 합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다고 한 많은 사람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외양적으로도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가서 종교적인 상투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은 우리자신과 모순되어 있지요. 우리의 영적인 생활 조차도 성경에 너무나도 많이 나타나 있는 형제에 대한 자비, 은혜, 그리고 사랑에 대해 부정을 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한 목사님이 기독교인이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나쁜 것은 그들의 친구들이나 동료를 교회로 초대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그렇게 말한 까닭이 그들과 친한 사람들은 그들의 생활방식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이죠. 그들은 험담과 뒷얘기, 불평 그리고 신령과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들의 친구들은 그들의 상스러운 농담을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목사와 그 가족을, 게다가 자신들이 충실한 교인으로 인정되어지는 것을 항의하는 것 같은 사람들까지 집어삼키고 있을 때, 같이 점심을 들곤 했지요. 그들은 상사를 비판하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지요.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으로부터 얻는 해방감과 자유를 제시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울고, 춤추고 부르짖는 동안에, 어떤 사람들은 성직자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아직 그들의 생활이 변하는 것에 별다른 영향력을 주지 못해왔던 것 같습니다. 그들을 인도한다고 하는 성령은 그들의 행동에 하나님의 공헌을 끌어들이는 데 실패하였고, 그들이 전하는 말씀은 그들의 마음을 우리 구조의 마음으로 변화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대해 얘기 하지만, 우리의 삶은 십자가의 삶을 반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마약과 과장을 선전하고, 우리의 예배가 어떤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예배를 일시적 유행과 신화적인 것들로 위장 시킵니다. 우리는 모든 수단을 다 써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추구하고 받으려고 시도해왔었으나, 비참하게도 우리자신을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에 바치지 못하여 왔습니다. 위대한 아주자거리의 부활에서 한 예언자가 말하기를 영적교회와 순복음교회에서 우리는 충만을 느낄 것이다 라고 말했다 합니다. 또한 마지막 날에 교회는 순결을 권세와 바꾸고, 신실함을 유행과 바꿀 것이라 하였습니다. 데이비드 윌커슨이 쓴 "그리스도가 없는 순복음"이라는 메시지에서 그는 가까운 친구 중 한 사람에 의해 드려진 제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초대기간동안 저자는 권력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교회의 한 쪽에 줄을 서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순결을 원하는 사람들을 교회의 한 쪽에 줄을 서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권력 열 사람 당 순결 한 사람 꼴로 줄을 섰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의 수치입니다. 우리는 눈이 멀었으며, 현혹되어왔습니다. 순결이 없는 권력은 있을 수 없고, 자기희생, 죄와 자만이 없이는 청렴도 없습니다. 아주 잘 안무된 춤, 음악과 가수의 조화와 아주 좋은 설교나 교훈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고 있는 것은 오랫동안 변화와 진실한 회개가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도전장을 보내고 변화 시키려는 하나님의 진실한 움직임은 모든 교회와 모든 예배에서 일상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메시지가 설교의 주제가 되었을 때, 신도들이 신령함과 순결함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고, 보통 그리 되어집니다.부족한
십자가 사탄은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그는 그의 제국에 미칠 영향에 마음을 졸입니다. 그는 십자가에 대해 설교하는 자들을 멸시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는 십자가의 능력을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속임수를 씁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성직자들이 효력을 가지게 합니다. 그것이 없이, 인류는 하나님께 만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 구원, 치유, 해방이나 우리가 하나님께 추구하는 어떠한 축복도 있을 수 없습니다. 태초부터, 사탄은 십자가의 말씀을 없애려고 하거나, 기만하려고 해왔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무례하고 구시대적이고 불필요하다고 형식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가 없이, 우리는 그리스도가 힘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요즘에 한창 인기가 있는 어느 이야기에 의하면, 당신이 한번 거듭난다면 앞으로는 십자가가 필요 없다고 합니다. 구원은 죄씻음을 가져오고, 그 후에는 그 죄에 대한 것이 다 해결된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이상, 순복음으로 전진해야 하고, 하나님의 선물과 복음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들은 모든 성직자들이, 성령의 선물이, 그리고 순복음의 경험들이 십자가의 말씀에서부터 발생한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또한 말하기를 우리가 지금 구원 받으면 그 다음 단계는 윤택하고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배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잘 들으세요., 십자가의 그늘밖에서의 윤택한 삶이란 없습니다. 백이십 명의 사람들이 다락방에서 나와 성령의 세례를 받고 방언을 하자마자, 베드로는 십자가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삼천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였습니다. 만일 사탄이 십자가의 중요성을 속일 수 없다면, 그는 다른 필요조건을 붙임으로써 십자가의 충분성을 흐릴 것입니다. 바울은 선언하였습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갈라디아서 6:12)"
물론 당신은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라고 갈라디아서는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 외에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또한 당신의 구원을 완성하기위해 할례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전부가 아닙니다. 승리는 온전히 갈보리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는 충분하지 않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사정은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순복음교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는데, 그것의 핵심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고 해도 입으로 말하지 않으면 완전히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카톨릭에서는 어떤 성례전과 일들은 반드시 십자가의 복음을 동반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그 다음 말씀에서 바울은 할례나 십자가에 보태어지는 어떠한 것도 의미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단지 그것이 우리에게 허락하는 것은 육체의 영광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길을 걷는 것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의 십자가의 목적입니다. 그것은 죽음과 자기부인, 그리고 모욕의 장소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기뻐했던 곳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복종으로 그 안에서 걷고 살아 감으로써 죄와 유혹을 극복하도록 십자가가 우리에게 준 그 은혜 안에서 말입니다. 만일 평범한 그리스도인에게 그들이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믿기로는 대부분의 반응은 이럴 것 입니다. "지옥으로 부터죠." 그러나 우리가 다시 거듭난 다음부터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육욕과 간음과 악용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있나요? 우리가 언제 부정과 거짓말과 도적질 등과 같은 것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적이 있었던가요? 이렇게 되려면 우리들은 십자가의 길을 매일매일 걸어가야 합니다. 사탄은 한 번 자기 것이 된 것은 그리 쉽게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는 우리들이 사탄의 재앙과 고통에서 치유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죄는 구원으로 해결된다고 하는 주장은 신도들로부터 그 이상의 용서를 앗아갔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마귀의 끈으로 묶여져 버리고 그 마귀의 끈은 사람들에게 죄로부터의 진정한 자유를 절대로 허락하지 않게 합니다. 그들은 설교하기를 당신이 구원 받은 이 후에 죄를 짓는다고 해도 그것은 자동적으로 회개없이 용서 되어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실에서 한 참이나 동떨어진 것입니다. 그들이 죄의 노예로 빠져 들어갈수록, 그들의 마음은 더 경직되어갑니다. 그들의 찬양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들의 설교는 육체의 훈련이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일로 기뻐할 따름입니다. 그들이 십자가에서의 끊임없는 관계를 원치 않음으로 인해, 그들의 그리스도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1;17,18) 진정한 주님의 능력은 십자가의 말씀으로부터 나옵니다. 그것은 공식이나 회의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주장하면서, 믿는다고 하면서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전달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갈보리의 언덕으로 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하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죽을 수 도 있어야 합니다. 다른 필요조건을 십자가에 덧붙일 때, 당신은 그 능력을 없애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또 하나의 좋은 예로 그리스도 철학과 정신의학과 같은 기독교관련단체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과학세계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왜 교회들은 더 많은 사람이 모일수록 이전보다 더 많은 문제를 가지게 되는 걸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인간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으로서의 십자가를 버려왔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세속에 물들은 교회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세상의 것들을 주님의 복음과 섞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다른 이와 나누시려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능력을 기부하시지는 않으실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격이 어떻든 그런 것은 상관하시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면 그는 우리의 전부를 바꾸어버리십니다. 악마는 십자가의 희생으로 물러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공포, 육욕, 취함, 마약, 살인, 거짓말, 도적질 등과 묶어버리는 사탄의 힘을 파괴시키셨습니다. 십자가를 한번 만나면, 우리는 사탄의 사슬을 끊어 버릴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와 매일매일 함께하는 삶은 우리에게 영원한 자유를 줄 것입니다. 만일 크리스챤 카운셀링이 100퍼센트 하나님 말씀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관계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감정적, 정신적, 그리고 영혼의 세계에서의 우리의 자유는 심리학, 정신의학, 우리자신의 의지력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와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